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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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7월 16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1-07-16
2021.7.16.(신축년 음력 6월 7일) 49齊 종범스님 法門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亦如目有翳 不見淨妙色 如是不淨心 不見諸佛法 역여목유예 불견정묘색 여시부정심 불견제불법又如明淨日 瞽者莫能見 無有智慧心 終不見諸佛우여명정일 고자막능견 무유지혜심 종불견제불이로다 (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나무아미타불 불교는, <마하반야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게 불교입니다. 반야 피안공덕(般若 彼岸功德), 반야 피안공덕, 반야로 피안에 가는데 그 피안에는 한없는 공덕이 있어요. 그게 반야피안공덕이다. 그럼 어떤 공덕이냐. 정각정견(正覺正見),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보는데, 법성실제(法性實際), 이 법이 천지 만물, 생로병사, 우주제법이 있는데, 거기에 본성 실제가 있다. 본성실제. 그거는 피안공덕 정각정견으로 얻어지는 세계거든요. 그러면 그 세계에 어떻게 가냐. 딱 방법은 한가지인데, 정심(淨心), 깨끗할 정자, 마음 심자, 정심으로 간다. 마음이 깨끗하면 다 이루어진다. 그걸 일심명정(一心明淨)이라고 그래요, 한마음이 밝고 깨끗하다, 일심명정. 일심이 명정하면 피안공덕을 이루고 법성실제에 도달한다 이거죠. 그러면 일체중생은 한마음에 부정이 끼었다. 깨끗하지 못한 게. 그래서 일심이 부정하면 생사윤회가 따르고, 일심이 명정하면 극락세계 법성실제에 도달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금방 전에 독송한 경은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인데, 역여목유예(亦如目有翳)하면, 눈에 가린 것이 있으면, 불견정묘색(不見淨妙色)하야, 아주 깨끗하고 오묘한 색을 눈에 가리고 있는 게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여시부정심(如是不淨心)으로, 이와 같이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불견제불법(不見諸佛法)이라, 제불은 모든 부처님인데, 모든 부처님은 뭐 하는 분이냐, 마하반야바라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분이다 이거죠. 극락세계가 다른 게 아니라 마하반야바라밀로 도달한 피안공덕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은 그 피안에서 정각정견으로 우주만법의 본성실제에 항상 있는 거예요. 우여명정일(又如明淨日)을, 또 밝고 깨끗한 태양을, 고자는 막능견(瞽者莫能見)하야, 눈이 가려진 사람들이 있는데, 눈이 가려진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거 같아서, 무유지혜심(無有智慧心)하면, 지혜심, 지혜의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종불견제불(終不見諸佛)이라, 마침내 모든 부처님의 세계, 반야바라밀세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세계를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범부는 사바세계에 머물고 제불은 극락세계에 머무는데, 사바세계는 삶과 죽음이 있는 세계고, 극락세계는 무량수 무량광,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해서 죽음이 없고, 어두움이 없다. 그게 피안공덕이거든요. 거기 가는 거는 일심명정, 명정으로 간다. 한마음이 밝고 맑으면 간다. 생사는 본래 없는 건데, 일심이 깨끗하지 못해서 없는 생사를 스스로 만든 거다. 생사가 있어서 느끼는 게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해서 없는 걸 느낀다 이거에요. 그걸 비유해서 말하기를 눈에 가리워진 것이 있으면 맑은 허공에서 꽃을 본다. 이걸 병목공화(病目空華)라고 그러는데. 눈병이 나면, 병목인데, 멀쩡한 허공에 꽃이 피더라 이거죠. 병목공화. 그래서 인생 문제는 다른 거 아무것도 없고 내 한마음을 깨끗하게 맑히면 끝나는 거예요. 인생 문제는 절대로 구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성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오래 머물러서 이루어지는 게 절대 아니에요. 인생은, 구하다 죽고, 이루다 죽고, 머물다 죽는 게 인생이에요. 한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만들면 생사도 없고, 어두움도 없고, 공포가 전혀 없다. 그게 극락세계다 그거죠. 極樂問答 극락문답問 極樂在乎 答 有也문 극락재호 답 유야 問 在何處耶 答 只在目前 문 재하처야 답 지재목전問 吾何不見 答 但由不淨心 문 오하불견 답 단유부정심問 云何往生 答 念佛一念 即得往生문 운하왕생 답 염불일념 즉득왕생 극락 문답(極樂問答)이 있는데, 어떤 분이 묻기를, 극락이 재호(極樂在乎)아, ‘극락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질문을 받은 분이 대답을 하길, ‘있다.’ 유야(有也)라. 그럼 재하처야(在何處耶)오, ‘극락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대답을 하기를 지재목전(只在目前)이라. 오직 극락이 눈앞에 있다. 기가 막히죠. 그러니까 또다시 묻기를 오하불견(吾何不見)고, ‘극락이 눈앞에 있으면 나는 어째서 보지 못합니까’,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단유부정심(但由不淨心)이라, 다만 부정심,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눈앞에 있는 극락을 못 본다. 그러면 이렇게 손을 하나 들어서 보이면, 이게 극락세계인데, 여기에 생각이 끼어들면, ‘저건 사람 몸이다, 저건 손이다’, 이런 생각이 끼어들면 이 법성실제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근데 한마음이 깨끗하면 이 손이라고 하는 것은 자체가 없고, 여기에 삶과 죽음이 없고, 극락세계다 이거죠. 그러면 극락 갈라면 어떻게 해야 되냐. 묻기를 운하왕생(云何往生)고. ‘어떻게 하면 극락세계에 가서 날 수가 있습니까.’ 물으니까, 대답을 하기를 염불일념(念佛一念)으로, 염불, 무량수불, 무량광불, 청정법성불, 진여실상불, 신통자재불, 대자대비불, 이런 부처님을 생각하는 한 생각으로, 즉득왕생(即得往生)이라, 바로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남을 얻는다. 염불일념으로 즉득왕생이라. 摩訶般若 彼岸功德 正覺正見 法性實際마하반야 피안공덕 정각정견 법성실제 不可思議 解脫境界 壽光無量 清淨法界 불가사의 해탈경계 수광무량 청정법계安樂淨土 極樂世界 圓滿具足 華藏刹海안락정토 극락세계 원만구족 화장찰해로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마하반야의 피안공덕(摩訶般若 彼岸功德)인데, 정각정견(正覺正見)으로 보는 법성실제(法性實際)다. 그런데 이거는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에요. 생각할 수 없는 해탈경계에요. 근데 이게 해탈경계만 생각할 수 없느냐. 이 중생의 고통, 장애도 불가사의해요. 중생의 근심 걱정을 누가 만들어 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불가사의하게 지가 만든 거예요. 정말 희한도 안 해요. 걱정 근심을 누가 갖다줬나. 순전히 지가 만들어서 지가 받는건데, 불가사의해요. 어떻게 저렇게 근심 걱정을 만들어서 괴로워할 수가 있지, 참 신기해요. 극락세계 가는 것도 불가사의해요. 아주 불가사의해요. 수광무량 청정법계(壽光無量 清淨法界). 이 피안공덕은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어서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청정법계다. 일심이 명정하면 근심 걱정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뭘 이루어서 해결하려고 하면, 새가 허공을 다 날고 죽겠다고 계속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는 거예요. 아, 이것 참, 불가사의해요. 날아도 날아도 다 날 수가 없는데 새들은 계속 날다가 죽어요. 인생사도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고 이뤄도 이뤄도 끝이 없는데, 계속 이루려고 하고 계속 가지려고 하다가 그냥 죽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한마음을 밝게 딱 밝히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에요. 이루려고 하면 못 이룬다. 밝히면 만족하다. 아무리 말해도 말을 잘 안 듣더라고. 왜냐. 그걸 안 해봤기 때문에. 아주 간단해요. 인간은 탐애(貪愛)와 조견(照見)이 있는데, 탐은 없는 거 구하는 게 탐이고요, 애는 있는 거 집착하는 게 애인데, 탐애가 이게 부정한 마음이에요. 그런데 마하반야 큰 지혜는 조견이요. 조명이란 조자인데, 한자에서는 볼 조자라고 그래요. 견자도 볼 견자고. 탐애하지 말고 딱 보면 대상이 없어져 버려요. 그리고 계속 보면 보는 마음도 없어져요. 그게 경공심공(境空心空)이라고 그래요. 경계, 저 대상 경계도 보면 없어지고, 그다음엔 마음작용도 보면 없어져서 그냥 텅 비어있는데, 또 계속 보면 빈 것도 없어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본다. 그럼 대상도 형태만 있지,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마음도 작용만 있지,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또 대상도 없고 마음도 없는 그 경지를 계속 보면 그 없는 것도 없다. 그러면 수광무량 극락세계다.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는 극락세계다. 그 세계는 안락정토(安樂淨土)라고, 편안할 안자, 즐거울 락자, 편안하고 즐거운, 근심 걱정 없는 곳, 그걸 정토라고 그래요. 깨끗할 정자. 정토라는 말은 근심 걱정 없는 곳이다라는 소리예요. 원만구족(圓滿具足)해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남는 거 하나도 없고. 모자란다고 채우고 남는다고 버리는 건 전부 부정심으로 하는 행위에요. 남는 거 없어요, 모자라는 거 없어. 마음이 명정하면 그냥 원만구족이에요. 내가 스스로 마음이 맑지 못해서 짜증 내는 거지 짜증 낼 게 하나도 없고요. 내가 스스로 마음이 맑지 못해서 자꾸 탐구, 탐하고 구한다 이 말이죠, 탐하고 구할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구한 거 때문에 내가 괴로워져요. 아, 이거 참. 내가 구한 게 없으면 절대 괴로운 게 없어요. 다 내가 구해서 내가 괴로운 거예요. 이게 묘법인데, 구해서 괴롭고, 탐해서 괴롭고. 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조견이에요. 그냥 보는 거예요. 딱 봐요. 좇아가지 말고 본다. 눈도 감지도 말고 크게 뜨지도 말고 평상으로, 평상아니라고 그러는데, 평상의 눈으로 따악. 눈에 물체가 들어와도 그거 좇아가고 마음 두지 말고, 생각에 기억이 일어나도 그거 좇아가고 마음 두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오온이 개공(五蘊皆空)한 걸 조견하게 되고, 일체가 다 청정법계임을 보게 된다. 이거죠. 그래서 화장찰해(華藏刹海)라고, 화장찰해란 말은 화장은 공덕이란 말인데요, 찰해는 세계라는 말이고, 이게 청정심, 명정심으로 딱 보면 일체 만물이 전부가 법성공덕이다. 법의 본성의 공덕이다 이거죠. 念佛親往生 如氷上燃火염불친왕생 여빙상연화火猛則水液 氷液則火滅 화맹즉빙액 빙액즉화멸(道綽撰, 安樂集卷上) (도작찬, 안락집권상) 그럼 법성이란 뭐냐. 고인들이 비유해서 말을 하기를 토,철,은,금으로, 토, 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철, 쇠로 그릇을 만들고, 은, 은으로 그릇을 만들고, 금, 금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토기, 철기, 은기, 금기가 있는데, 이게 기피는 수수(殊)나, 그 그릇 껍데기는 다 다르나 기내는 일공(一空)이라, 그릇 안은 하나의 빈 공간이다. 껍데기는 흙이 있고, 쇠가 있고, 은도 있고, 금도 있지만, 그릇 안에 있는 공간은 전부 일공간이다, 하나의 공간이다, 이거에요. 그걸 비유해서 법성이라고 해요. 법은 그릇 껍데기와 같고 성은 그 그릇 안에 있는 공간과 같다. 그러면, 마음이 맑아지면 그 법성을 본다 이거죠. 마음이 맑지 못하면 그 껍데기만 보고, 그 법의 본성을 못 봐서, 그래서 근심 걱정 없는 데서 근심 걱정을 하고 있다. 근데 극락세계를 어떻게 하면 가냐. 극락 가는 걸 되게 대단한 일로 생각하는데, 이거는 너무 쉬운 거예요. 극락이 없는 데가 없기 때문에, 여권도 필요 없고, 자동차도 필요 없고, 걸음 걷는 것도 필요 없고, 아무 절차가 없어요. 그냥 한마음으로 가는 거예요. 일념 염불로. 염불 일념으로. 그래서 그걸 고인들이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염불친왕생(念佛親往生)은, 염불을 해서 친히, 몸소, 극락세계 가는 것은, 비유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여빙상연화(如氷上燃火)하야, 빙상에, 얼음 빙, 윗 상, 얼음 위에, 연화라, 불태울 연, 불 화, 얼은 얼음에 장작개비를 놓고 불을 태운다는 말이지. 그러면 처음에는 그 밑에는 물이 있고, 중간에는 얼음이 있고, 위에는 불이 있는데, 처음에는 얼음 때문에 물을 못 보죠. 근데 그 얼음 위에 불을 피워요. 이게 빙상연화에요. 그러면 화맹즉빙액(火猛則水液)이라, 그 태우는 불이 아주 맹렬하게 뜨거우면 어떻게 되냐. 빙액을 해요. 얼음이 액체가 되요, 얼음이 녹아버려요. 얼음판 위에다 불을 피웠는데, 불이 막 뜨거워지니까 얼음이 녹아버려요. 화악 녹으면 어떻게 되냐. 처음에는 그 장작불도 꺼져버려요. 그래서 처음에는 얼음이 있고 불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얼음도 녹고, 불도 꺼져서 얼음 속에 있는 물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극락세계는 두 가지 마음이 한마음으로 되는 거예요. 두 마음이 한 마음 되는 게 극락세계다. 그러니까 얼마나 쉬워요. 이거는 뭐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가고, 털끝 하나 움직이지도 않고 가고, 차를 탈 필요도 없고,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고,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기가 막히지. 一念清淨 淨心現前일념청정하야 정심현전하면 塵塵淨土 處處極樂진진이 정토요 처처가 극락이로다나무아미타불 한 생각이 깨끗해져서, 일념이 청정하야(一念清淨), 정심이 현전하면(淨心現前),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면, 진진이 정토요(塵塵淨土), 티끌티끌이 정토세계요, 처처가 극락이라(處處極樂), 곳곳이 극락세계다. 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面見阿彌陀면견아미타하고往生安樂剎왕생안락찰하십시오面見阿彌陀면견아미타하고往生安樂剎왕생안락찰하십시오나무아미타불 아미타(阿彌陀)는 극락세계 항상 계시는 수광무량불,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오늘 영가께서 이 아미타불을 면견(面見), 바로 얼굴 앞에서 보시고, 왕생안락찰(往生安樂剎)하십시오. 안락찰은 극락세계인데, 이 극락세계에 바로 가서 태어나십시오. 오늘 법문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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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 11일 백중기도 초재 법문
가섭스님 2021-07-11
20210711 백중기도 초재 가섭스님 법문 반갑습니다. 저번 주에 백중 입재를 하고, 첫 번째, 백중 7재 중에 오늘은 초재입니다. 올해 백중은 작년 코로나 이후에 맞는 백중이다 보니까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올해 백중은 앞으로 저랑 몇 번을 만나면서 백중기도를 해 나가실 건데, 저는 올해 백중의 큰 주제로 <대전환, 그리고 공동체> 이렇게 정했습니다. 저번 시간에 첫 번째 입재할 때도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데 우란분이라고 하는 것, 우란분재라고 하는 것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라고 하는 뜻이라고 그랬죠. 거꾸로를 바로 하는 게 우란분재의 원래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전환이에요, 전환. 돌린다, 그런 뜻이거든요. 불교의 수행, 신행이라는 것이 돌리는 거거든요. 돌리는 거. 이고득락도 돌리는 거죠. 괴로움을 돌려서 즐거움을 얻는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괴로운 마음을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돌리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은 이렇게 백중이란 거 자체가 ‘원래의 조상을 모셔서 좋은 법담을 들려 드리고 또 법연을 열어드리는 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마음의 전환이에요, 돌리는 거예요. 그리고 백중이라는 것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전환 시키는 것 플러스 공동체의 마음을 갖는 거예요. 결국은 백중이라고 하는 것이 백 명의 대중을 모셔서 백 가지 음식을 차려 가지고 그 은덕으로 본인의 부모님을 좋은 곳으로 인연 맺게 하는 그러한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 내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혼자 기도하고, 혼자 수행하고 혼자 덕을 쌓아서 좋은 갈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쉽게 말하면 우리 승가공동체나 아니면 우리 수행공동체나 우리 불교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서 함께 그 공과 덕을 나누어서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백중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 대전환이라는 것과 공동체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새기는, 자기화하는 그런 것이 바로 백중의 참의미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번 주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백중의 유래와 공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백중을 하는 우리의 목표,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다, 보통 output이라고 얘기하죠, 효과. 백중을 해서 우리가 어떤 효과를 누릴 거냐.’라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첫 번째는 법연을 베풀어서, 법연의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에 백중의 7재는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잔을 올려드리고 경전을 같이 독송하면서 부모님에게,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드리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죠. 그냥 입재만 해놓고, 물론 스님들이 알아서 정말 여법하게, 특히 우리 진관사 같은 경우에는 많은 스님들이 정말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해드리지요. 거기다가 내가 와서 직접 잔을 올려드리고 독송을 같이 하는 것, 이게 합쳐지면 그 공덕이야말로 뭐라 비교할 수가 없죠. 그리고 중요한 게, 법연을 내가 스스로 참여하는 것, 내 마음을 밝히는 것을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육정참회라는 걸 얘기했어요, 육정참회. 육정참회는 불교의 수행 중에 굉장히 중요한 항목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원효스님께서도 육정참회론이라든지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6가지 기관을 가지고, 6가지 기관을 잘 관리하는 것이 수행의 깊이를 더하고 또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가장 기초적인, 가장 기본적인 수행의 단계다’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죠. 그리고 육정을 단속을 해야 수행이란 맛을 볼 수 있어요. 육정을 그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놔도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 말이죠. 그래서 이 수행이라든지, 기도라든지, 신행이라든지 이것은 안이비설신의 이 6가지를 잘 관리 감독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라는 거예요. 이걸 그대로 놔두고, 내가 기도를 해서 가피를 얻고, 성취하겠다는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를 논밭에 풀어놓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가을에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없죠. 그래 놓고는 뭐가 이루어졌니, 뭐가 안 이루어졌니, 좋으니, 나쁘니, 영험하니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아무 소용이 없는 얘기에요. 그래서 육정참회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밝혀야 되는데, 육정참회를 하다 보면 그다음에 실상참회가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설명이 약간 부족했어요. 시간이 몰리다 보니까 조금 부족했는데, 이 실상참회는 <모든 상은 비상이다>라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모든 상이 있는 거 자체가 인연 따라 이루어진 거지 원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집착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상은 비상이다. ‘그 비상인 것이 여래의 모습이다’ 그랬어요, 부처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법이다. 법은 연기다. 이렇게 죽 연결이 되는 거죠. ‘우리가 당신은 부처님입니다’라고 맨날 진관사에서는 인사말을 하는데 ‘그 부처님이 그대로 비상이다’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란 거에요. ‘당신은 부처님입니다’하면 이 법문을 들은 분들은 ‘아, 내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다 비상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핵심이거든요. 그래야 번뇌 근심 걱정이 내려앉을 수가 있어요. 이 비상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가 잘 안 되면 그래서 비유를 든 게 허공 비유에요. 저번 주에는 컵 뚜껑을 들고 얘기를 했는데, 여기에 종이 한 장이 있으면 종이 한 장을 다 태운다고 불을 붙여 태울 때 종이가 다 타고나면 재가 남잖아요. 재도 바람에 싹 날아가면 아무것도 안 남잖아요. 이게 비상이란 말이에요. 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허공을 의지해서 불도 나고 종이도 타고 재도 남고 재도 다 사라지지만, 그 허공은 그대로 있단 말이에요. 허공에 비유한 게 비상이에요. 허공에 비유한 게 여래이고, 허공에 비유한 게 부처님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요 대목이 약간 설명이 부족해 가지고 복습하는 차원에서 같이 했어요. 제가 오다 보니까 서울시교육청에서 버스 정거장에 광고를 붙여놨는데 카피가 있어요. 카피, 광고문인데, 뭐라고 돼 있냐 하면 <지구의 온도, 배울수록 내려갑니다.>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밑에 부제로 설명이 휴지 대신에 손수건을 쓰고,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보다는 텀블러를 쓰고, 그러면 글을 아는 만큼, 배운 만큼 지구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거예요.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서 지금 난리거든요.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도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인지를 못 하지만, 우리가 인지 못 하는 사이에 지구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요. 지금 캐나다 이쪽에서는 난리입니다. 왜 난리냐. 온도가 55도까지 올라가요. 수돗물을 틀면 뜨거운 물이 나와요. 그런데 또 계절이 바뀌는데 폭설이 내려요. 이런 기후의 변덕스러움이 왜 왔느냐. 원래 지구가 그런 거냐. 안 그렇다는 거예요. 지구는 원래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너무 많은 자원으로 너무 많이 소비하다 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그걸 그대로 갖다 쓰면, 그 출발이 어디냐 하면, 우리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카피를 보면서 배운 만큼 지구 온도가 내려가는 만큼, 우리가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만큼 우리 마음의 욕망의 온도도 내려간다. 그러니까 백중이라고 하는 이 기도는 여름 뜨거운 삼복에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를 내리는 거예요, 핵심이. 적어도 그렇게 해야 된다. 지금 백중기도를 하면서, 입재 해서 같이 오면서,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만 드글드글 끓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의 온도를 확 끌어올리는 재료가 되는 게 있어요. 그게 다섯 가지의 욕망과 일곱 가지의 정 때문에 그래요. 오욕칠정이라고 그럽니다. 오욕칠정. 다섯 가지 욕망이 있거든요. 우리가 먹는 식욕, 요즘에는 많이 먹어서 병이 되지, 많이 안 먹어서 병이 나는 사람은 없어요. 많이 먹어서 병이 나잖아요. 그게 식탐이에요. 식욕, 많이 먹어서. 그리고 잠에 대한 욕망인데, 이것은 좀 부지런해야 되는데, 부지런하지 않고 자꾸 눕고 싶은 거예요.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서 있다가 앉는 것만 해도 얼마나 편한데요. 이건 해본 사람만 알아요. 젊을 때 기도를 한다고 4시간 반, 다섯 시간을 서 있던 적이 있어요. 정근할 때. 지장청을 하는데, 4시간을 계속 서서 지장청을 한 거예요. 중간에 사제나 다른 스님이 교대를 해줘요. 교대를 해줘서 목탁을 옆에서 쳐줘요. 목탁을 네 시간 동안 치다가 목탁을 내려놓으려고 하면 손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목탁을 한 십 분 동안 들고 있어요. 그러다 서서히 움직이면 점차 펴지잖아요. 네 시간 동안 서 있다가 앉으면 관절에서 아우성을 쳐요. 뚝뚝 소리가 나고. 그런데 무릎 꿇고 앉는 순간,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한 거죠. 사람은 지금보다 더 편한 걸 자꾸 찾는 거예요. 수면욕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런 오욕이라는 것에 항상 우리가 얽매져 있고, 그죠. 오욕 때문에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요. 이걸 내려놔야 되요. 내려놔야지만이 된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마음을 전환시켜야 되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천년고찰 진관사에 그동안 많이 왔다 간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왔다 간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현재 바라고 이루고자 한 것들을 와서 바래서, 기원해서, 바람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열에 여덟은 진관사 와서 마음을 돌린 거예요. 마음을 전환시킨 거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마음을 전환시켜야 되요. 어떻게? 내 마음에 들끓던 그 마음들을 나 스스로가 관찰하고 내려놓으려고 노력을 해야 되요. 그래야 진관사의 천년 역사의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어요. 주파수가 맞을 수가 있어요. 진관사라는 이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진 훌륭한 멋진 도량은 그런 에너지의 응집력이 있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와야 그걸 타가는데, 엉뚱한 채널을 가지고 오니까 와서 기도를 해도, 안 한 거 보단 좋지만, 크게 마음의 전환에, 크게 마음의 기쁨에, 마음의 충만함을 얻어가지 못한다. 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희로애락이잖아요, 희로애락. 희로애락이란 게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하는 거예요. 마음을 느끼는 거란 말이죠. 그렇게 이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더 나아가서는 그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이쁘고 아름답고 멋있던 사람이 같이 살다 보니까, 같이 살다가 낳아보니까, 지금은 눈에 넣어서가 아니라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으면 좋겠다. 얼마나 속을 징글징글 썩이는지. 그게 다 이 칠정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이쁘고 아름답고 멋있는 것이 살다 보니까 ‘웬수가 따로 없어.’ 라고 느끼는 것. 그게 칠정 때문에 그렇다는 거. 그래서 우리가 백중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의 오욕칠정을 통해서 올라가는 우리의 마음의 온도를 내려야 된다. 그것에 백중의 참의미가 있다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은평구를 운전해서 오는데 언덕이 몇 개 있어요. 어떤 40대 후반에서 50대 되는 거사님이 서울시에서 운행하는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앞에다가 가방을 큰 거 하나를 싣고, 비가 오니까 누구를 마중하러 가나 봐요, 우산 두 개를 싣고 가는 걸 운전하고 오면서 봤어요. 그 언덕배기를 낑낑대고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내려서 끌고 가는 게 더 편할 거 같은데, 언덕을 얼마나 힘겹게 올라가는지 내가 옆에서 지나치는 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정도로 용을 쓰면서 올라가요. 언덕배기에 딱 올라갔는데, 제가 신호에 걸렸어요. 근데 그 거사님이 그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와 가지고 언덕에 올라오는 순간 좍 내려가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내리막이니까. 내려가는데, 내가 신호가 풀리면서 지나가면서 그 거사님을 유심히 봤어요. 얼굴과 몸이 땀 범벅이에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걸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자전거를 타면서 언덕배기를 올라오는 사람이 요거만 올라오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다는 걸 아는 거죠. 그러니까 참고 그 언덕배기를 땀을 흘리며 올라오겠죠. 그런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오욕칠정 때문에 내가 부글부글하는 걸 알아요. 아는 데 거기서 그친단 말이에요. 이걸 전환시켜서, 이 오욕칠정의 욕망을 조금 전환시켜 가지고 우리가 마음을 쓰면, 그 오욕칠정이라는 것이, 아까 얘기했듯이 ‘전부 다 비상이야, 원래 상이 아니야, 원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현재 느껴지는 인연 따라 온 감정일 뿐이야’ 라고만 알아차려도 큰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걸 모르니까 만날 거기에 끌려가는 거예요, 오욕칠정에. 부글부글, 뽀글뽀글, 찌글찌글 맨날 그러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백중 7재 동안에 진관사에 오면서, 진관사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쌓았던 기도의 공덕을 오롯하게, 고스란히 내가 담아가려면 그 마음의 전환을 해야 한다. 그것을 안 하고는 절반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능소화가 늘어지게 필 때에요. 능소화가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런데 능소화가 질 때는 더럽기가, 촌스럽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우리가 능소화가 환하게 필 때는 참 화려하다, 예쁘다 그러는데, 능소화가 질 때는 ‘아따, 더럽다, 추하다’ 그런단 말이에요. 우리가 태어나거나 살아갈 때는 꽃을 보듯이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데, 늙거나 죽음을 앞두거나 죽으면,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해요. 이게 분별심이거든요, 분별심.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이 죽음에 관련된, 과연 죽음이란 게 두려운 거냐,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공동체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셔서 마음의 온도, 마음의 욕망의 온도를 우리가 수행하고 신행할수록, 알아갈수록 자신의 마음의 욕망의 온도는 내려간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말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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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7월 10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7-10
2021년 7월 10일 음력 6월 초하루 신중기도 종범스님 법문 -불신(佛身)과 불성(佛性)이야기- 신축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법문할 내용은 부처님, 중생심, 마음씀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佛圓光 : 佛身佛智이야기불원광 : 불신불지이야기三佛圓融 十身無礙 身智光明 普照法界 삼불원융 십신무애 신지광명 보조법계佛身普現 十方三世 佛智妙光 常放光明 불신보현 시방삼세 불지묘광 상방광명無障無礙 圓滿具足 普門示現 靈通自在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부처님, 부처님은 누군가. 왜 부처님인가. 어째서 부처님이 되었나. 그런 뜻인데요. 부처님은 둥글고 밝다. 그래서 둥글 원자, 빛 광자, 원광(圓光)이라고 그럽니다, 원광. 불원광(佛圓光). 어째서 원광인가. 부처님은 몸이 태어난 몸에서 깨달은 몸을 얻었다. 깨달은 몸이 둥글고 밝다. 이런 뜻이죠. 둥글다는 말은 끝이 없다. 밝다는 말은 어둠이 없다. 끝이 없고 어둠이 없는 몸을 깨달음을 통해서 얻으셨다. 그걸 부처님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 몸을 불신(佛身), 부처님 불자, 몸 신자, 불신 이렇게 쓰는데, 깨달은 몸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의 마음을 불지(佛智), 부처님의 지혜, 깨달은 마음이에요. 깨달은 몸, 깨달은 마음. 이것을 불신불지(佛身佛智),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범부는 뭐냐. 범부는 태어난 몸을 가지고 살아요. 태어난 몸. 그래서 범부의 몸을 날 생자, 몸 신자, 생신(生身)이라고 하거든요, 생신. 근데 부처님은 그 태어난 생신의 몸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불신을 얻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요. 그리고 범부는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생각하는 마음. 그런데 부처님은 지혜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 자기 경험에서 오거든요, 생각은. 그래서 경험을 업이라고 그러는데, 범부가 아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업식(業識)이라고 해요, 업식. 알 식자. 부처님은 깨달은 지혜로 안다. 불지라고 그러고. 불지와 업식. 그럼 깨달음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느냐. 해탈을 얻었는데, 불교가 가르치고 서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탈이에요, 해탈. 그럼 해탈은 뭐냐.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하고, 다 벗어나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찬탄할 때, 삼불이 원융하고(三佛圓融), 십신이 무애하고(十身無礙), 그렇게 하는데요. 부처님에게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불이 있는데, 이 삼불이 다 함께 통해요. 원융이란 말은 함께 통한다. 또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는데, 이 열 가지 몸이 걸림이 없어요. 십신이 무애라. 그래서 신지광명이 보조법계라(身智光明 普照法界).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온 법계를 다 비춘다. 이렇게 예경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불신이 보현 시방삼세라(佛身普現 十方三世). 부처님의 몸이 시방삼세에, 온 공간에, 온 시간에 널리 다 나타난다. 그래서 불지묘광佛智妙光)이, 부처님의 지혜 묘한 광명이,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볼 때도 거기에 묘한 광명이 있고, 허공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고, 사람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어서, 일체 나타난 현상이 묘광이 아닌 게 없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어두운 밤에도 어두움을 느낄 때는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어두움을 느끼고, 밝음을 느낄 때도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밝음을 느낀다. 그래서 밝거나 어둡거나, 있거나 없거나가 전부가 묘할 묘자, 빛 광자, 묘광(妙光)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에요. 그래서 그 부처님 세계는 깨닫고 나면 해탈인데, 그 해탈은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한다. 그래서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래요, 무장무애. 장애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게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이에요. 무장무애. 그리고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고 그래요, 원만하고 다 갖추어져서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남는 거 하나도 없어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그리고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그래요. 보문이란 말은 넓을 보자, 문 문자인데, 온갖 곳에, 넓은 문이라 이 말은 여러 곳에, 온갖 곳에, 일체 처소에, 시현이란 말은 나타난다. 이게 깨달은 부처님의 세계에요. 그리고 영통자재(靈通自在)라,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한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럼 이 영통자재라는 게 뭔가. 부처님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고 가고 싶은 데 가요. 그게 영통이에요. 저곳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와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라고 하는 30권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법문이 부처님이, 세존이 미리 도솔(世尊未離兜率)하시고,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강왕궁(已降王宮)하시고, 이미 왕궁에 강림을 하시고, 이렇게 나와요. 미출모태(未出母胎)에,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도인이필(度人已畢)이라, 중생제도에 마쳤다. 이게 영통자재에요.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하는 거예요. 이걸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래서 신통이란 말을 쓰는데, 신통이란 말이 허공을 날라다니고, 먼 곳을 일시에 가고, 이것은 현상신통이고, 이 각지, 깨달은 지혜의 신통은 이런 거예요.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사바세계에 오고, 사바세계를 떠나지 않고 도솔천에 가고, 이곳을 움직이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이게 영통자재에요. 衆生心 : 佛性心性이야기 중생심 : 불성심성이야기①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②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③ 淨心(정심) 染心(염심) ④ 性心(성심) 緣心(연심) 清淨法身 汝之性也 圓滿報身 汝之智也 청정법신 여지성야 원만보신 여지지야 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천백억화신 여지행야 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자성구삼신 발명성사지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六祖壇經, 參請機緣제6) 불리견문연 초연등불지 (육조단경, 참청기연제6) 그러면 이런 깨달음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얻었나. 중생심(衆生心)에서 시작해서 얻은 거예요. 중생심, 중생의 마음. 중생의 마음이 없으면 불원광도 없어요. 불원광, 중생심, 이게 두 번째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중생심은 다른 말로 하면 불성(佛性)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이고, 깨달음을 얻는 본성이다, 이런 말이죠. 불성. 그리고 심성(心性)이라고 그래요, 중생심을. 심은 마음 심자인데, 온갖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그 낮에나 밤에나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마음이 심인데요. 그 마음속에 근본 성품이 있는데, 그걸 심성이라고 그래요, 심성. 중생에는 성심도 있고 용심(用心)도 있고, 쓰는 마음. 우리가 오고 가고 하는 건 용심인데, 쓰는 마음인데, 그 용심 속에는 바탕이 되는 성심이 있어요. 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본성. 그래서 불성이다. 심성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이게 다 중생심이거든요. 중생심은 불성이다. 중생심은 심성이다. 그런 말이죠. 덥기는 덥고, 법문도 점점 잠 오는 법문만 하고. 잠이 와. 왜냐. 평소에 안 들어보던 말이라 법문 업식이 많이 형성이 안 돼서. 법문은 아는 소리를 해야 듣지, 모르는 것 소리하면 못 듣는 게 업식이 형성이 안 돼 가지고 그래요, 업식이. 내가 처음에 절에 와서 심지법문 한다고 그랬는데, 시골에서 심지는 호롱불 심지밖에 모르는데.(웃음) 그래서 호롱불 심지법문 하나 싶어가지고 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 법문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 업식이 안 되면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얘기 하면 잠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중생심이 이렇게 용심도 있고 성심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하는 논에서는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이렇게 가르쳐요. 진여심이란 말은 참 그대로 그냥 변함이 없는 거예요. 참 그대로. 참 진자, 같을 여자. 허공이 무너져도 변함이 없고, 지구가 없어져도 변함이 없고, 이걸 진여심이라고 해요. 생멸심이라는 건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찰나심이에요. 찰나 찰나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그걸 생멸심이라고 그래요. 이게 중생심이거든요. 그리고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자성이 항상 물듦이 없어요. 청정해요. 그리고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이게 중생심이에요. 번뇌망상이 항상 있는데, 자성청정심이 또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중생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청정심과 번뇌망상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이게 중생심이죠. 그리고 관심론(觀心論) 같은 데서는 간단하게 중생심을 청정할 정자, 마음 심자, 淨心(정심)이라 이렇게 가르치고, 또 물들 염자, 마음 심자, 染心(염심)이라 이렇게 가르쳐요. 정심은 자성청정심이고, 물든 마음 염심은 번뇌망상심이라 이 말이죠. 그리고 보통은 중생심을 말할 때 性心(성심), 자성청정 본성, 성심이 있고, 또 인연을 따라서 늘 좇아가는 인연 연자, 마음 심자, 緣心(연심)이 있다. 이게 중생심이에요. 중생심은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중생심을 잘 맑히면 바로 번뇌망상심, 염심, 물든 마음, 인연을 좇아다니는 연심, 나고 죽고 하는 생멸심, 이것이 그대로 지혜광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게 없어요. 그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경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느냐. 부처님의 청정법신(清淨法身)이 중생의 본성이다. 청정법신은 너의 본성이다(汝之性也). 부처님의 지혜광명신, 원만보신은 너의 지혜다(圓滿報身 汝之智也). 부처님의 천백억화신 자비원력신은 너의 행동이다(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이렇게 가르쳐요. 중생에게는 본성이 있고 지혜가 있고 행동이 있는데, 중생의 행동은 부처님의 천백억화신이고, 중생의 지혜는 부처님의 원만보신, 지혜광명이고, 중생의 본성은 부처님의 청정법신이다. 그게 중생의 본성, 불성이에요. 그래서 자성에 구삼신하니(自性具三身), 자성에 삼신이 갖춰져 있으니, 법신, 보신, 화신, 부처님의 삼신이 중생의 자성심에 갖춰져 있다. 그러니까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라. 발명이라는 게 없는 거 만들어 내는 게 아니고, 여기서는, 펼 발자, 펼쳐서, 밝을 명자, 밝히면, 중생에 있는 자성심을 펼쳐, 밝혀, 펼치고 밝히면. 근데 범부에게는 번뇌망상심이 있어서, 번뇌망상심 때문에 자성청정심이 펼쳐지질 않고 밝혀지질 않아요. 예를 들면 이게(컵) 청정법신, 진여광명인데 이걸 떡 보이면 이걸 지혜로 보지 않고 번뇌망상으로 보니까, ‘이것은 그릇이다. 시장에서 파는 거다, 내거다, 네거다’, 이런 것만 알지, 이거 자체가 지혜광명 청정법신이라는 걸 몰라요. 이걸 번뇌망상이라고 그래요. 번뇌망상에 가려져서 그것이 펼쳐질 수가 없다. 그래서 발명이라는 건 번뇌망상에 가려진 지혜몸을 펼치고 밝히면, 성사지(成四智)라,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지가 사지라고 그러는데, 사지라는 말은 중생의 의식이 전부 바뀌어서 네 가지 지혜가 되는 거예요. 8식이 바뀌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고, 7식이 바뀌어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6식이 바뀌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5식이 바뀌어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이걸 사지라고 그러는데, 펼쳐서 밝히면 부처님이 이룩한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성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성불하는 게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하고. 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견이라는 건 눈으로 보는 거고, 문이라는 건 귀로 듣는 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상인연을 불리, 아니 불자, 여윌 리자, 여의지 않고, 일상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라. 뛸 초자, 그러할 연자인데, 초연히 불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초연등불지라. 삼신사지 경지에 오른다 이 말이에요. 불지는 삼신 사지인데. 그러면 눈으로 물건을 보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이게 초연등불지라고. 어째서 그렇게 되냐. 초연이란 말은 뛴다는 말이데, 뛴다는 말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매이지 않는다. 눈으로 이렇게 그릇을 보더라도 그릇에 매이지 않고 바로 삼신사지에 들어간다. 법신, 보신, 화신. 조금 아까 얘기한 네 가지 불지에 들어간다 이거예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초연이라, 이걸 거부하는 게 아니라, 초연이라, 거부가 아니에요, 수행이 라는 건 거부가 아니라 초연이에요. 초연이란 건 보되 보는 데 매이지 않는 걸 초연이라고 해요. 매이지 않으면 초연이에요. 뛰어난 듯이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아니하면 거기에서 뛰어난 듯이, 이 말이거든요. 나무를 보되, 봐요. 거기에 매이지 아니하면 그게 초연이에요. 뛰어난 거다. 물질을 보되 보는 물질에 매이지 않으면 그게 초연이다. 그래서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어디에도 매임이 없이, 삼불 사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것이 전부 중생의 몸속에 다 들었다. 그런데 중생은 태어난 몸만 알고, 태어난 몸, 부처님의 깨달은 몸을 모른다. 태어난 몸하고 깨달은 몸하고, 깨달은 몸을 불신이라고 하고, 태어난 몸을 생신이라고 그러는데, 이 생신을 자기로 여기고, 불신을 자기로 여기는 게 그게 제불과 중생의 차이점인데요. 자기라고 하는 건 뭐냐. 옛날 언해본에 보면 자기를 어떻게 번역을 했느냐 하면, 내 몸 이랬어요, 내 몸, 스스로 자자는 나, 몸 기자는 몸(自己), 그러면 내 몸이라고 하는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불신,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억화신, 이게 내 몸인데, 중생이 느끼는 내 몸은 태어난 몸만 내 몸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태어난 몸이 뭐냐, 난 몸인데, 난 몸. 난 몸은 뭐냐. 생로병사지요. 생각은 번뇌망상이지요. 중생이 나라고 느끼는 내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을 내 몸으로 아는 거예요. 이게 난 몸이에요, 난 몸. 그걸 내 몸이라고 한다 그거죠. 자기. 그런데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자기는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업화신, 그게 내 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태어난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이니까 만날 걱정근심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망상으로 시작해서 망상으로 끝나는 게 일생이에요. 더 오래 살아봐야 별수도 없어. 만날 망상하다가 끝나요. 백 년 망상하나 50년 망상하나 그게 그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미움받겠네, 여기 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그러는데.(웃음) 이 몸도 건강을 맨날 챙기는데, 건강 챙겨봐야 나중에 화장할 땐 똑같아요. 집 하나도 관리를 하려면 맨날 청소하고 그래야 되는데, 수리하고, 나중에 포크레인 가지고 뜯을 때는 청소했던 집이나, 청소 잘 안 했던 집이나 똑같아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보이고 들리는 일에 그렇게 얽매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집을 쓸고 닦아봤자 나중에 포크레인으로 뜯을 때는 아무 표도 없고, 아무리 몸을 잘 보호해 봤댔자 죽어서 화장할 때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그러면 그 몸이 죽기 전에 자기 본래 몸, 불성 몸, 이걸 본신이라고 하는데, 본신, 본성 몸, 불성 몸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본 몸이란 말이죠. 본 몸 자기. 난 몸 자기, 난 몸 자기에서 본래 몸 자기로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건 생각지도 못하고 태어난 몸에 얽매여 살다가 죽어요. 또 그게 한이 안 풀려 가지고 내세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12연기, 생사윤회에요. 善用心 : 六塵三昧 이야기 선용심 : 육진삼매 이야기① 眼見色 分別色 不隨念 色塵三味 안견색 분별색 불수념 색진삼매② 耳聞聲 分別聲 不隨念 聲塵三味 이문성 분별성 불수념 성진삼매 ③ 鼻聞香 分別香 不隨念 香塵三味 비문향 분별향 불수념 향진삼매 ④ 舌嘗味 分別味 不隨念 味塵三味 설상미 분별미 불수념 미진삼매 ⑤ 身覺觸 分別觸 不隨念 觸塵三味 신각촉 분별촉 불수념 촉진삼매 ⑥ 意分別 一切法 不隨念 法塵三味 (神會和尙禪話錄) 의분별 일체법 불수념 법진삼매 (신회화상선화록)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첫째, 매이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데, 본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첫 번째 발걸음이 매이지 않는 연습. 이 매이지 않는 연습을 뭐라고 그러냐 하면 선용심(善用心)이라고,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쓰는 거다. 용심을 잘하면 이 난 몸에서 본래 몸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그러면 마음 잘 쓰는 게 뭐냐. 일상생활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이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진(六塵)이라고 그러는데, 6진 속에서 우리가 사는데, 그 육진 속에서 자재를 얻어요. 그걸 육진삼매(六塵三昧)라고 해요. 마음을 잘 쓰는 것은 보고 듣는 데서,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자유자재를 얻는다. 그게 육진삼매에요. 이 법문은 혜능선사 제자 신회(神會)선사라고 있는데, 그 신회선사어록에 아주 중요하게 수록된 법문인데, 육진삼매가 이것이 일상삼매다. 삼매는 바를 정자, 볼 관자, 정관(正觀), 바를 정자, 볼 견자,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바르게 자재하는 걸 삼매라고 그래요. 정관, 정견. 그러면 눈의 삼매가 어떤 거냐. 안견색(眼見色)하고, 눈으로 색을 본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게 다 색이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 사물이 다 색인데, 눈으로 온갖 사물은 다 보고, 분별색(分別色)하되, 보이는 것을 분별해서 다 구분을 해요. 요거는 물질이다, 요거는 물이다, 나무다, 여기는 똑같이 다 하는 거예요.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아니 불자,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따라서 생각한다는 말은 이걸 꼭 가져야 된다, 이걸 꼭 버려야 된다, 이건 값이 비싼 거다, 이건 가치가 없는 거다, 이렇게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 소리예요. 이 수념이 문제예요,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따라서 생각하는 게 문제에요. 보고 듣는 덴 허물이 없어요. 따라서 생각하는 게 허물이요. 이 수념 때문에, 따라서 생각하는 번뇌망상 때문에 중생이 고통을 받는다 이거죠. 그래서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색을 보고 색을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색진삼매(色塵三味)다. 보이는 티끌로부터 다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아, 이거 참.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이거 보는 데는 허물이 없어요. 근데 이거는 내가 싫어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좋아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저 밖에서 요령소리가 나오면 들을 뿐이에요. 근데 저게 무슨 소리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다, 내가 싫어하는 소리다, 이렇게 하는 건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망상이에요. 걱정근심이란 건 전부 망상에서 오는 거예요. 죽어보지도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거든요. 이게 번뇌망상이에요. 아이, 죽어보면 될 거 아니에요. 미리 걱정하지 말고. 똑같아요. 이문성(耳聞聲)하고, 귀로 소리를 듣고, 분별성(分別聲)하되, 소리를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성진삼매(聲塵三味)라, 듣는 티끌로부터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똑같이 나와요. 비문향(鼻聞香)하고, 분별향(分別香)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향진삼매(香塵三味)라. 코로 냄새를 맡고, 맡는다는 말은 들을 문자를 써요, 똑같이. 들을 문. 냄새를 코로 듣는다. 맡는다 이 말이죠. 맡고. 분별향하되, 냄새, 향기를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향진삼매라. 냄새로부터 삼매를 얻어요. 정관, 정견, 자재를 얻어. 또 설상미(舌嘗味)하되, 혀로 맛 볼 상자가 있는데, 맛을 맛보되, 설상미하고, 짜고 맵고 한 맛을 맛보고, 분별미(分別味)하되, 맛을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게 미진삼매(味塵三味)라. 맛의 티끌로부터 삼매를 얻는다. 신각촉(身覺觸)하고, 몸으로 촉각을 느끼고, 분별촉(分別觸)하되, 촉을 분별하되, 내가 접촉한 대상이 차냐 더우냐 이런 걸 다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촉진삼매(觸塵三味)다. 의분별(意分別) 일체법(一切法)하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기억 속에. 그래서 색성향미촉을 외진(外塵)이라고 그러고, 바깥 티끌, 법을 내진이라고 그래요, 기억 속에 있다고, 안에 있는 티끌이다. 그러면 우리 의식 속에는 온갖 사람도 있고, 물질도 있고, 그냥 걱정도 있고 다 있어요. 기억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이게 조금 후에 내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를지 아무도 모르고요, 또 오늘 저녁에 잘 때 무슨 꿈 꿀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 기억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마치 허공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기억을 하되 그 기억에 안 따라가면 돼요.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느끼고 내버려 둬요. 그러면 그것이 법진삼매라(法塵三味). 기억을 안 일어나게 한다든지, 기억을 멀리한다든지 이건 잘못이고, 기억이 일어나면 기억을 느끼되 그 느끼는 기억에 못 하는 생각이나 나쁘다는 생각을 안 일으키고 자기 평상심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그게. 기억의 삼매라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게 중생의 번뇌망상에서 자성청정심, 해탈 경지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매이지 않는 훈련을 해야 되요. 공연히 매이는 거예요. 몸에 매이고, 그래서 몸 꾸미려고 애를 쓰는데 몸 그거 꾸며봤댔자 화장할 때 아무 소용도 없고요. 이러면 또 성형외과 의사분들이 들으면 싫어할 거 같아. 그런 거예요. 그리고 집 꾸미려고 그러고, 여러 가지 꾸미려고 그러는데, 그거 다 부질없는 거거든요. 그러면 뭐가 중요하냐. 내 생각이 자유로운 거. 생각이 자유롭다라는 건 매이지 않을 때 생각이 자유로워요. 그래서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듣되 듣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재를 얻으면 이것이 중생의 번뇌망상 속박에서 해탈경지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에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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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5일 백중기도 입재 법문
가섭스님 2021-07-05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때보다도, 올해 백중은 입재를 맞이하면서 ‘다른 해보다도 좀 더 진중해진다고 해야 하나요, 마음이 좀 무겁게 입재를 임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솔한 마음으로 백중 입재를 하고, 우리가 회향할 때쯤 되면 코로나가 진정으로 집단 방역이 와서 누구나 다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가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 코로나라고 하는 이런 전염성 바이러스는 전 인류가 다 같이 잘해야 돼요. 이 바이러스가 진화를 해요. 변이라고 하는데, 변이바이러스, 환경에 맞춰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진화해요. 마치 우리의 마음이 욕망을 따라가면 그 욕망에 좀 더 좀 더 물들어서 커지듯이 바이러스도 그런 거 같아요. 백중 입재를 맞이해서, 백중이란 말은 불교 말로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 합니다. 우란분이란 말은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말이에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것은 목련존자의 이야기입니다. 목련경에서 유래된 이야기인데, 목련존자의 어머니에서 유래된 이야기이지요. 근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한 번도 거꾸로 매달려 본 적이 없잖아요. 거꾸로 매달리면 안 됩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있어요. 혹시라도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운동기구 중에 거꾸리라는 게 있어요, 발을 걸쳐 머리가 땅으로 가는 거. 그거 5분만 하고 계셔 보세요. 피가 몰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5분, 10분이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된다면 그 고통은 끝이 없겠죠. 무간(無間)의 고통이에요. 정말 사이가 없는, 정말 쉴 사이 없이 고통을 받는 과보인데, 혹여라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런 어려운 인연에 닿아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면은 이 백중을 맞이해서 그것을 해원(解冤)하는, 맺힌 마음을 풀어내는 그런 의미 있는 불교의 5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 워낙 자리를 잡아서,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 날 가장 많이 절에 오지만, 우리가 농경사회, 1970년대에는 이런 백중이나 동지나 입춘, 이때 절에 많이 왔어요. 그때보다는 지금 신도들이 좀 더 불교적이고 좀 더 세련된 거지요. 뭔가 아는 불자들인 거죠. 옛날에는 민속신앙과 결합이 되면서 백중이란 걸 굉장히 크게 봤습니다. 본래 백중은 음력으로 7월 15일인데, 오늘이 입재니까요, 음력 7월 15일인 8월 22일, 일요일 오전에 우리 진관사는 회향을 하는데, 백중은 백종(白踵)이라고도 불렀어요, 백종, 흰 백자에 발뒤꿈치 종자를 써서 ‘발뒤꿈치가 하얘진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논에 들어갈 일이 없다.’ 옛날에는 농사를 다 지었으니까. 발뒤꿈치에 논 흙이 묻을 일이 없는 거예요. 이제 백중이 지나게 되면 모든 자라던, 성장하던 나무나 풀들이, 위로 오르던 물들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결실을 맺는 거예요. 열매가 단단해지기 시작해요. 벼도 익고 과실도 익고 그래요. 논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발뒤꿈치가 하얘진다고 해서 백종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불교적으로 와 가지고는 백중(百衆)이 되었죠. 백 명의 대중을 모시고 부모님의 무문(無門)갈래에 가시기를 염원하는 거잖아요. 또는 백 가지 음식을 차려 가지고 백 명의 스님을 모시고. 그래서 백중은 다른 말로는 스님들에게 수행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공양을 내는 날이기도 해요. 요즘에는 백중 회향을 승보 공양의 날이다, 그래서 삼보 중에 스님들에게 공양 내는 날이다, 이렇게 또 새로운 신행 문화가 움트기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찰에서 그렇게 행사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백중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목련존자로부터 출발했다 말이에요. 목련존자가 견성을 하고 삼매에 들어보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의 지중함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지극한 거거든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좀 일찍 여의었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 여의었는데, 올해가 40년 됐어요. 그래서 40년째 뭘 해드리면 좋을까 하다가 이만하게 그림을 그려 가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 사진이 바래면 못 쓰니까 이만하게 진영을 하나 그려 가지고- 법당에 모셔놨어요. 40년 기념으로. 잘 했지요. 딱 모셔놓으니까 뭔가 그래도 생전에, 내가 어렸을 때 못 했던 은혜 갚음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스로가 들더라고요. 물론 학인 때는 못 했지만, 소임 살면서는 제가 늘 어머니 기제사를 모셨고, 백중 때도 늘 동참해서 모셨어요.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승속을 떠납니다. ‘스님들은 출가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없겠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역대의 큰스님들도, 진묵스님이나 우리가 잘 아는 경허스님도 견성을 하고 어머님을 모셔다가 같이 생활을 했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부모님, 선망부모에 대한 지극한 마음은 출가자나 출가자 아닌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게는 똑같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련존자도 이렇게 마음이 열리고 나서 어머니가 어디 계신가 보니까 어머님이 나쁜 갈래에, 춥고 어둡고 그런데 가 계신 거예요. 보니까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그때 마침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어머님이 살아생전에 불교의 인과나 윤회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었어요, 다른 믿음을. 그래서 다른 수행자라든지 다른 마음 닦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지 않고 좀 심술을 부린 거 같아요. 놀부 심보가 있었다고. 탁발을 하러 오면, 공양을 얻으러 오면 흔연하게 주는 게 아니라 좀 괴롭히기도 하고. 마음이 우란분이었던 거 같아요. 거꾸로 되어있었던 거 같아. 우리도 가끔 심술 날 때 있잖아요. 사촌이 땅을 산다든가 옆집이 아파트를 넓혀서 이사를 간다든가 좋은 차를 산다든가 하면 약간 좀 거시기하잖아요? 어머니도 그렇다 보니까 나쁜 갈래에 빠져있는데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막 올라오는 거예요.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살아생전에 길을 가다가, 급하게 길을 가다가 딱 멈춰가지고 거미를 밟을 뻔했던 거예요. 근데 그걸 잘 발견해 가지고 거미를 밟지 않고 잘 지나친 거예요. 그냥 지나쳤는데 거미를 살려주려고 지나친 게 아니라 신발에 묻을까 봐. 차이가 있어요. ‘거미를 살려줘야 되겠다,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이게 아니라 ‘어, 거미를 밟으면 내 신발이 지저분해지는데’ 하면서 안 밟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 자체가 공덕이 돼서 거미를 살려준 공덕으로 거미줄이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그걸 타고 올라오는 거예요. ‘아, 어머니는 이제 조금 나쁜 갈래에서 벗어나는구나.’ 하고 있는데 밑에, 나쁜 갈래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 거미줄을 잡고 막 같이 올라오는 거예요. 거미줄이 끊어지겠어요? 안 끊어지겠어요? 그건 몰라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끊어질 거 같지만 모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머니 마음에 불안한 거예요, 끊어질까봐. 그래서 냅다 올라오는 사람을 발로 찼어요. 옆으로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떨어지면서 그 반동으로 거미줄이 똑 떨어져 버렸네. 그래서 올라오다가 다시 나쁜 갈래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그때 목련존자가 ‘아, 나의 공력으로는, 나의 힘으로는 어머니를 무문 갈래로 인도할 수가 없겠구나.’ 해서 어머니를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좋은 갈래로 가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가서 ‘우리 어머님이 좋은 갈래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게 되지요. 그러면서 우란분경이 형성이 되고, 그게 유래가 돼서 우란분재, 백중이 우리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겁니다. 그만큼 목련존자는, 어떻게 보면 신통제일, 10대 제자 중에 신통제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효행제일인거 같아요, 효행제일. 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전원일기 아시죠? 2021이라는 전원일기 프로그램을 했어요. 거기에서 너무 오랜만에, 우리 어렸을 때 전원일기 안 보고 자란 사람 없을 거예요. 그 전원일기를 올 해 출연진들을, 최불암씨, 김혜자씨 등 다 출현을 시켜서 다시 하는데, 제가 보다가 눈물샘이 터져 가지고 펑펑 울었어요. 어떤 장면에서 제가 눈물이 터졌냐 하면, 김회장 댁에, 최불암씨가 김회장이잖아요, 전화기를 새로 놓은 거예요. 옛날엔 전화 처음 놓으면 얼마나 희안합니까. 며느리들도 막 와서 자기 친정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거에요, 며느리들이. 반가워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전화기를 딱 놓고 머리맡에, -옛날엔 안방에 전화기를 놨어요, 왜냐하면 밖에 놓으면 쓰니까 못 쓰게 하려고,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머리맡에 전화기를 딱 놓고 자는데, 김혜자씨가 자다가 일어난 거예요. 일어나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리고는 전화기를 듭니다, 누운 상태로. 전화기를 들어서 ‘거기 우리 엄마 좀 바꿔주세요. 우리 엄마는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우리 엄마는 이런 옷을 입고 있고...’ 이렇게 혼자 이야기를 해요. ‘우리 엄마한테 시집간 딸이 잘살고 있다고 꼭 좀 전해주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최불암씨가 옆에서 깼어요, 중얼중얼하니까. 최불암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잠꼬대하냐’고 그래요. 잠꼬대가 아니라 진짜 엄마가 보고 싶은 거죠. 이제는 나이도 들고 자식들도 다 결혼하고 나니까 어머님이 더더욱 생각이 나고, 본인도 나이가 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어머니, 시집올 때의 어머니가 생각이 나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어요. 전화기를 놓고는 김혜자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바라는 거는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추운 데가 뭐예요? 나쁜 갈래거든요. 추운 거만큼 힘든 게 없잖아요. 배고프고 추운 거만큼 견디기 힘든 건 없어요. 추위는 어떻게 피할 데가 없어요. 더위는 그늘이나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좀 피할 수 있지요. 근데 추위는 정말로, 배고프고 추운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 지극한 마음에 동화가 돼 가지고, 동기화가 되어 전염이 되어 나도 모르게 TV를 보면서 늦깎은 비구가 휴지를 가지고 눈물을 닦으면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한 번 더 했는데, 신도들이 막 울더라고요. ‘왜 우느냐?’고 그러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누구나 다 가슴에는 그런 그리움들이 있는데, 그리움들을 잘 해원해야 하는데, 그리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미운 그리움도 있고, 진짜 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거든요. 지금 어머님의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그 부모님과 관계가 정말 좋은 부모 자식간이 있는가 하면은, 부모님과 관계가 영 좋지 않은 자식도 있거든요. 백중이라고 하는 것은 선망부모, 돌아가신 분도 천도를 해야되지만, 지금 내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살아계신 부모님과도 이 49일 동안에, 혹여나 관계가 좀 소원하다면 그 소원한 관계를 해원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된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에 해원하고 헤어져야 돼요. 우리가 재를 지내거나 내지는 기념일이 되어 제사를 모실 때 정말 매해, 제가 절에서 기제사를 지내다 보면은, 매해 제사 때마다 우는 분들이 계세요. 특히 딸들이 좀 그래요. 물론 정이 많고 속정이 깊으니까 그렇겠지만. 그런데 그 우는 딸들을 보면 뭔가 아쉬워. 뭔가 남아있어요. 좀 더 잘해드릴걸. 좀 더 내 마음을 표현할걸. 이런 생각들이 있단 말이에요. 돌아가시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살아있을 때 해야 되는데, 백중이라는 것은 그런 1차적인 의미가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백중을 지내야 되는 의미는, 작년에도 지냈잖아요, 여기서 절을 10년간 다닌 분은 10번째 지낼 거고, 20년 다니신 분은 스무 번째 지낼 거고, 그죠, 30년 된 분은 30번째 지낼 거란 말이에요. 매년 지낸단 말이에요. 똑같은 백중을 매년 지낼 필요가 있느냐. 단순히 부모님을 모셔 가지고 7번을 제사를 지내드리고 음식을 베풀어드리고 하는 의미로다가 한다면 1번이면 끝나요. 그런데 매년 지내드리는 의미가 뭐냐. 백중은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예요. 법음이라는 거예요. 법음, 법의 음성.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고,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는 법석을 마련하는 자리에요. 부모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거예요. 혹여라도 부모님이 서운한 게 있고, 아쉬운 게 있고, 또 부족한 게 있다면, 내지는 나쁜 갈래에 가 있다면, 나쁜 갈래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춥고 배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고 마음이 어두운 거예요.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탐진치를 보통 얘기하잖아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는 치암(癡闇)이에요, 어리석을 치에 어두울 암자, 치암. 어리석음은 캄캄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구분이 안돼.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암만 이야길 하고 설득한다고 해도 믿질 않아요. 믿지 않으니까 행동을 안하게 되죠. 절에 와서 기도하고 성취하는 사람을 보면요, 지나가는 스님이 하시는 말씀도 따라하는 사람은 성취를 해요. 앉혀놓고, 여기 총무스님께서 길게 얘기하면서 차도 따라주고 먹을 것도 주고 선물도 주고 해도 안 해요. 왜? 맘이 어두워서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성취를 못 합니다. 근데 스님이 지나가다가 ‘108배나 하고 가.’ 그런데 그 말이 확 꽂혔어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열심히 하고 간 사람은 뭔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마음이 밝기 때문에 그래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 표현한 게 어떤 부처님 말씀이나 어떤 우리에게 득이 되는 얘기를 했을 때 귀에 안 들어와요. 어둡기때문에. 안 보이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어리석음은 치혹(癡惑)이라고 해요. 치혹. 혹은 의혹. 미혹할 때, 의심한단 얘기에요. 어리석음은 두 번째 의심하는 거예요. 진짜로? 그렇다고? 마음에서, 또 하나는, 계속 갈등하는 거예요. 이렇게 할까, 이렇게 할까. 이 절이 좋을까, 저 절이 좋을까. 저 스님이 잘할까, 이 스님이 나을까. 스님 찾아 삼만리, 도량찾아 삼만리. 이러다가 시간을 다 보내요. 우리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그런 분들은 없는 거 같아요, 보니까. 이렇게 암하거나 혹한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이에요, 암혹. 암혹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 이게 나쁜갈래거든요. 마음의 나쁜 갈래는 암혹이에요. 마음이 어둡고 뭔가 천지구분을 못하는 상태가 되거든요. 이게 나쁜 갈래에요. 다른 게 나쁜 갈래가 아니고. 목련존자가 어머님께 지극함을 유래로 백중이 시작되었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나쁜 갈래에 빠져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가려면 첫 번째로는, 우리 종단에서 만든 불교성전에 보면 565페이지인가에 나와요. 거기에 보면 목련존자 얘기가 나오면서 부모님께 삼보를 믿게 하는 게 효도요, 부모님께 계행을 지키게 하는 게 효도요, 부처님께 선행을 하게 되는게 효도요, 부처님께 공덕을 짓게 하는 것이 효를 갚는 일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중에 첫 번째는 부모님을 모셔서 부모님이 혹시라도 이렇게 거꾸로 되어있는 마음들을 돌리게끔 하는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하는. 그러니 입재해 놓고 1,3,5,7만 와야합니까? 1,2,3,4,5,6,7 다 와야 합니까? 다 와야 해요. 왜냐. 여러분이 법을 여는 법의 주최자입니다. 잔치를 여는 주최자예요. 근데 손님을 모셔놓고 이렇게 단을 장엄스럽게 다 모셔놓고 법을 여는, 여기 위패를 모셨으면 여러분들 한분 한분이 다 복위(伏爲)란 말이에요. 복위, 복위자, 엎드려서 받드는 거란 거죠. 근대 엎드려서 해놓고는 이름만 걸어놓고 안 오면 안된다 말이죠. 둘째는 백중을 해야 되는 이유가 내 마음을 밝히는 것.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그런 말이 있어요. 잘못되면 조상탓이라고. 그런데 조상이 잘못되면 누구탓이다? 내탓이다 이거에요. 내 마음을 밝혀야지만이 조상의 마음이 편하겠지요. 이거는 뭐 유치원 애들도 아는 얘기에요. 우리 가정이 편안해야 우리 부모님이 편안하지 맨날 지지고 볶고 남편하고 싸우고 부인하고 싸우고 애들하고 싸우면 편안하게 생겼습니까.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을 참회해야 되요. 두 번째는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첫 번째는 어머님의, 선망부모님의 마음을 밝혀드리는 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이고, 그건 지금 입재했으니까 7번 잘 참석하면 되는 거고, 두 번째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내 마음을 밝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참회다. 첫 번째 참회는 어떤 참회가 있는가 하면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육정참회(六情懺悔). 여섯가지의 정, 정은 다른 말로는 근(根)이라고도 해요. 육근, 안이비설신의, 들어보셨죠? 육근. 그걸 다른 말로는 정이에요. 그놈의 정 때문에, 정 때문에 아시죠? 우리 정 때문에 그렇게 살은 거예요. 사랑 때문에 사시는구나. 다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정이 굉장히 무서운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중생을 다른 말로 유정(有情)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육정참회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참회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안이비설신의는, 우리 선망부모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 욕망에, 집착에, 감각에 매여있어요. 감정에 매여 있거든요. 우리 마음에 감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감정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감정.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부처님 빼고, 부처님만 빼고 뭐라고 막 비방을 하면 모두 화를 내죠.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 감정인데, 이 감정은 2억 5천만 년 전에,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들이잖아요, 진화론에서 보니까 우리가 산소농도가 이렇게 대기 중에 24%였다가 15%로 내려갈 때가 있었어요. 화산 폭발하고. 그래서 숨을 안 쉬어야 하니까 이 갈빗대가 원래는 척추까지 있었는데 이게 진화하면서 올라오게 된 거예요. 폐가 커진 거예요. 그리고 더 나가서는 뼈도, 뼈 안에도 이렇게 공기주머니가 있어요. 닭을 보면 닭 뼈가 안이 비어있지요. 겉은 단단한데 안은 비어있어요. 그 닭이 그때 진화하면서 그 뼛속에다 공기를 채우려고 뼈가 그렇게 생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갈빗대가 위로 올라오면서 폐가 커지면서 진화를 하는데 새끼를 지금까지는 밖에 낳아두면 알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걸로 끝났는데, 젖을 물리는 포유류들이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몸속에 잉태하기 시작한 거예요. 잉태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갈빗대가 위로 올라옵니다. 진화할 때. 그러면서 폐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서 아기를 낳죠. 자기의 젖을 물려서 키우기 시작해.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식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식을 낳아 본 사람하고 안 낳아 본 사람하고 집착의 크기가 달라요. 달라, 스님들은 안 낳아 봐 가지고 평생 애들이야. 철이 없어요.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옛날 어른스님들이 제가 뭐 할 때 스님들은 나이 먹어도 철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기분 나빴어요. 제가 조금 아까 얘기했죠. 저 욕하면 싫어한다고. 스님들이 도 닦으러 온 사람들인데 철이 없어. 그런데 살아보니까 철이 없어. 뭐 이렇게 집착이 별로 없어요. 스님들이 보면은. 끝에 가면 결국은 웃는 힘들이 있어. 그게 조금씩 조금씩 몇억 년 동안에 이어오던 인간이 갖는 감정, 집착 이런 것들이 안하다 보니까 조금씩 주는 것 같아요. 이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아기를 기르는 것은 이것보다 위대한 일은 없어요. 다만 감정의 출발이 어디냐, 이걸 말씀드리다가 여기까지 온건데, 그 감정이라는 것은 몇억 년 동안에 이렇게 우리의 DNA속에 쌓였다. 감정이란 그렇게 생긴거다. 감정은 원래 있던 게 아니란 거예요. 감정이 내가 이생에 생명을 타고 나면서 쌓이고 만들어졌던 거다. 그래서 이 육정이라는 것은 그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고, 빠지기 쉽고, 홀리기 쉽고, 속기 쉬워요, 쉬운 말로. 쉬운 말로 사기당하기 쉬워요. 좀더 좋은 거, 좀더 편안한 거, 좀더 좋은 소리, 좀더 안락한 거, 이런 거 보면 그쪽으로 가게 돼있어요. 이때 그 마음을 탁 알아차려서 잡는 게 육정 참회에요. 그렇게 해야 마음이 밝아진다. 육정참회를 하고 나면, 육정참회는 자비도량참법이나, 거기에 보면 열 가지의 참회가 나오는데, 열 가지를 기준 삼아서 참회하는 게 나오는데, 거기에 육정참회가 나와요. 안근에 대한 참회, 비근에 대한 참회 등 자비도량참법 해보시면 거기 나온단 말이에요, 그 얘기고. 그리고 나서는, 자기마음을, 어리석음을 밝히면, 아까 암혹이라고 했죠, 암혹, 암혹한 마음을 밝혀서 밝게 하면 내 마음이 밝은 만큼 부모님도 밝아진다.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내 마음이 지글지글 뽀글뽀글 갈등과 대립과 맨날 불만으로 산만함으로 가득가득한데 어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힘이 있겠느냐는 거예요. 마음이 밝혀. 마음이. 육정참회를 통해서. 육정참회를 하다보면은 그다음에 마지막 실상참회입니다. 실상참회는 뭐냐. 말 그대로 실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참회를 하면 할수록. 이 실상참회의 키워드는 그건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건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제상은 비상이다(諸相非相)>. 입으로 따라 해야 되요. 제상은 비상이다. 제상은 비상이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란 거예요. 아시죠. 금강경에 나오죠.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런 얘기가 나온다 말에요. 비상, 모든 상이 아니라고 보는 게 여래를 보는 거예요. 여래를 봐야지 마음이 밝아지죠. 우리 맨날 진관사에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여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래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당체요, 여러분은 부처님이요, 여러분은 연기적 존재요, 여러분은 모든 상이 비상이다. 마음이 확 밝아져야하는데, 이 얘길 들으면. 번뇌가 싹 녹아내리고 밝아져야 하는데, 눈빛들이 아리송해. 아리송해. 모든 상은 비상이에요. 여기에 뚜껑이 있어요. 이걸 정말 강한 불로 태우면 뭐만 남아요? 허공만 남아요. 허공. 허공은 타지 않아요. 허공의 다른 말은 비상이에요. 허공, 그게 반야에요. 허공이, 이 컵이 허공을 의지해서 타고, 불이 허공을 의지해서 이 컵을 태우지만 결국은 이 컵도 사라지고 불도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하나가 허공이에요. 허공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허공같은 게 뭐냐, 바로 반야다. 내가 부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게 허공이에요. 그 에너지는 무한한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여래다, 나는 진리다, 나는 부처님이다, 나는 비상이다, 모든 상이 아니다, 아, 나는 허공과 같은 존재다. 비어있다는 게 아니에요. 허공은 꽉 차있는 겁니다. 그런데 허공은 텅텅 비어있어요. 아시겠지요? 다 알아듣는 눈빛이네요. 백중은 이렇게 내 조상의 마음을 밝히는 기간으로, 순간으로, 법석으로 만들고, 말미암아 내 마음도 늘 그렇게 실상반야로 늘 부처님의 마음으로 함께 해서 늘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늘 승리하는, 번뇌에 지지않고 늘 승리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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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6월10일 음력 5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6-10
-身命과 慧命 이야기- 오늘 진관사 신축년 5월 초하루 법문은 <몸생명, 지혜생명>, 몸생명, 지혜생명,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생명을 신명(身命)이라고 하고,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활은 거의가 다 몸생명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몸생명을 위한 불교를 또 옛날에는 생활불교라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치유라고도 해요, 치유. 힐링(healing)이다. 그게 다 몸생명 불교라는 얘기에요. 생활불교, 치유불교. 다스린다는 말이죠, 치유는. 우리나라가 70년대에 대학생 불교수련회가 사찰에서 많았거든요. 그런데 수련회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관심 사항이 뭐냐.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불교 교의, 불교에서 가르치는 뜻, 그것에 관심이 있고요. 그다음에는 불교가 우리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생활에 도움, 생활의 이익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기간을 정해서 여름에 결제를 하고, 겨울에 결제를 하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서 결제를 해서 참선을 하는데, 학생들이 하는 참선은 깨달음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는가, 운동선수들은 어떻게 하면 운동경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많았어요. 생활불교라고 하고요. 福德 복덕日日有 千祥之慶 時時無 白害之災 일일유 천상지경 시시무 백해지재壽山高屹 福海汪洋 수산고흘 복해왕양身無一切病苦厄難 心無一切貪戀迷惑 신무일체병고액난 심무일체탐연미혹三障頓除 五福增崇 (釋門儀範 祝願篇)삼장돈제 오복증숭 (석문의범 축원편) 그리고 일상생활도 부처님께 축원을 하는데, 거의가 몸생명을 위한 축원이에요. 불교의식문 축원문에 보면 만날 하는 게, 일일유 천상지경이라(日日有 千祥之慶), 나날이 천 가지 좋은, 상서로운 복이 있고, 시시무 백해지재라(時時無 白害之災), 때때로 백 가지 해로운 재앙이 없어진다. 이런 걸 원하거든요. 수산이 고흘(壽山高屹)하고, 이런 거. 수명, 목숨 산이, 목숨이 저 산처럼 아주 높고, 복해가 왕양하고(福海汪洋), 복 바다가, 바다처럼 깊고 넓고,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이고요. 신무일체병고액난(身無一切病苦厄難)하게 해주시고요, 몸에는 일체 병고와 액난, 병고가 없도록 해주시고, 심무일체탐연미혹(心無一切貪戀迷惑), 마음에는 탐연, 탐내고 얽매이는 미혹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런 게 전부가 몸과 생활을 위한 축원이거든요. 삼장이 돈제하고(三障頓除), 삼장이 있는데, 세 가지 장애, 세 가지 장애는 혹업고(惑業苦)라고 해서, 미혹장애, 업장장애, 고난장애, 마음이 미혹한 장애, 악업이 쌓이는 장애, 고난이 다가오는 장애, 이런 혹업고 삼장을 바로 한꺼번에 제거하게 해주시고. 오복이 증숭하고(五福增崇), 오복은 불교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유가 서적에서도 많이 말하는데, 사람이 항상 필요한 거예요. 수(壽), 부(富), -수명, 재부, 재물부자,-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강녕(康寧, 건강할 강자, 편안할 녕자). 수, 부, 강녕, 항상 건강을 필요로 하잖아요. 늘 써붙여요. 수부강녕, 부모강녕, 이런 거. 어른들에게는 강녕이란 말을 쓰고, 아이들에게는 건강이란 말 쓰고 그러더라고요. 그 뜻은 같은 뜻인데, 애들에게 ‘강녕하시오’란 말 잘 안 쓰고요. 유호덕, 넉넉할 유자인데, 덕이 넉넉하고, 심덕이 있는 게 복이라고요. 마음의 덕이 있는 게. 고종명이라고 해서 자기 수명대로 사는 거, 수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횡사(橫死)라고 해요. 뜻밖에 죽었다고, 비명횡사, 이런 거. 객사, 밖에 나갔다가 생각지 않게 죽었다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 명을 차분히, 편안히 맞게 해주세요. 이런 게 오복인데, 오복이 증숭이라, 계속 높이 높이 불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축원을 매일 해요. 그게 복덕(福德)입니다. 이런 복덕 축원을 항상 한단 말이에요. 그게 신명이에요. 生活 생활三法和合 名爲衆生삼법화합 명위중생 一壽 二煖 三識 (涅槃經33)일수 이난 삼식 (열반경33) 行住坐臥 語默動靜 着衣喫飯 痾屎放尿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그런데 몸이 살아가는 거, 몸이 구성된 거, 이런 걸 또 가르치고 있는데, 이 몸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열반경 제33권에서는 몸이라는 걸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요. 첫째는 뭐냐. 목숨 수자(壽)를 썼는데, 목숨이 끊어지면 몸이 아니에요. 몸은 목숨이다. 목숨은 뭐냐. 숨 쉬는 거거든요. 그래서 수명이라고 그러는데, 그건 어려운 말이고, 목에 있는 숨이에요. 우리말로. 목에 숨이 있으면 그게 몸이에요. 한심해요. 몸이라는 거,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에 숨 쉴 때 몸이지, 몸에 숨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기가 막혀요. 그다음에, 따뜻할 난자(煖). 몸이 따뜻해야 몸이에요.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면 몸이 아니에요. 체온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호흡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다음에 식이라고 해서, 알 식자(識)인데, 의식이에요. 의식이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의식이 있나 없나 이러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체온도 있고, 호흡도 있고 의식만 돌아오지 않은 걸 식물인간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의식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3가지가 다 함께 있을 때 그걸 중생이라고 한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산다는 게 아무리 복을 빌고 좋은 걸 많이 해도, 이 몸 자체가 생각에 잘못이 있다든지, 체온에 잘못이 있다든지, 호흡에 잘못이 있으면 그냥 몸이 아닌 거예요. 사는 게 아닌 거예요. 이런 거 참 중요해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생활(生活)을 뭐라고 그러냐. 행주좌와(行住坐臥), 이게 생활이에요. 행, 돌아다니고, 주, 멈추고, 머물 주자가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멈춘다는 뜻이거든. 돌아다니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좌, 앉기도 하고, 와, 누워서 자기도 하고. 이게 생활이에요. 행주좌와. 어떤 삶을 살아도 행주좌와는 마찬가지예요. 다니고 멈추고 앉고 자고, 그거죠. 그리고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어, 말하고, 묵,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동, 움직이고, 정, 고요하고. 어묵동정. 행주좌와. 이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생활이에요. 생명활동. 그리고 생활을 항상 이야기하는 말 중에 착의끽반(着衣喫飯)이란 말을 써요. 착의, 옷 입고, 끽반, 밥 먹고. 이 옷 입고 밥 먹지 아니하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산다는 게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밥 먹는 게 사는 거고, 옷 입는 게 사는 거예요. 그 뭐 대단하게 생각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재밌는 게 있는데, 아시방뇨(痾屎放尿)란 말이 있는데, 아시는 대변보는 걸 말해요. 대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돼요. 방뇨는 소변보는 걸 말해요. 소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이게 사는 거예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가고 서고 앉고 자고, 말하고 조용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또 옷 입고 밥 먹고, 대변보고 소변보고, 이거예요. 여기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똑같은 거예요. 이게 생활인데, 이걸 잘하기 위해서 옷 잘 입고, 밥 잘 먹고, 잘하기 위해서. 또 화장실 잘 꾸미고. 화장실도 참 웃겨요. 아시방뇨가 중요하지, 화장실 변기가 중요한 게 아닌데, 변기만 좋으면 뭐 해요. 변을 잘 보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그렇지. 근본이 이건 거예요. 변 보고, 옷 입고, 밥 먹고, 움직이고. 이게 생활인 거예요. 그게 그냥 생활이에요. 근데 이 생활이 오래가냐. 오래 안 가거든요. 만날 건강을 위해서 밥도 먹고, 건강을 위해서 병치레도 하지만, 밥을 먹는 사람이나 안 먹는 사람이나 죽어요. 병이 있는 사람도 죽고 병이 없는 사람도 죽어요. 건강하다고 좋아하지만, 건강한 사람도 죽는다는 거예요. 이걸 신명이라고 하거든요. 몸생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죽어요. 그러면 이게 죽고 나면 뭐가 남는 게 있나 없나, 도대체. 뭐가 남아. 아무것도 안 남나. 이거거든요. 慧命 혜명謂自性清淨心 難可了知 위자성청정심 난가료지彼心爲煩惱所染 亦難可了知 (勝鬘經自性清淨章제13) 피심위번뇌소염 역난가료지 (승만경자성청정장 제13)世尊 於此起煩惱 剎那心 剎那相應 (勝鬘經一乘章제5) 세존 어차기번뇌 찰나심 찰나상응(승만경일승장제5)自性清淨心 常寂常光 자성청정심 상적상광煩惱所染心 剎那相應번뇌소염심 찰나상응 無明行識 名色幻身 무명행식 명색환신定觀照見 眞如法身 정관조견 진여법신在水邊人 但見其水 與像別異 (法圖記叢髓錄) 재수변인 단견기수 여상별이 (법도기총수록)只由不以其水 爲眼故也 (卷下之一 法記)지유부이기수 위안고야 (권하지일법기) 그래서 몸생명에는 지혜생명이 있다. 지혜생명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해요, 지혜 혜자, 목숨 명자, 혜명. 그래서 생명을 얻어서 생명으로 살다가 생명으로 죽고, 다음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걸 윤회라고 그러는데, 혜명은 한번 얻으면 영원해요. 혜명. 그래서 부처님이 이 신명 속에서 혜명을 얻었다. 신명은 생로병사인데, 혜명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에요.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고 청정하고. 이 생로병사에서 상락아정의 혜명을 깨닫는 거예요. 깨닫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이 몸속에 지혜생명이 있는데 모르거든요. 있는데 모르는 거예요,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걸 혜명을 얻는다. 또 혜명을 전한다. 혜명을 또 잇는다고 해요, 이어. 그러니까 이 지혜생명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이게 마음인데,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뇌심이 있고, 자성심이 있다. 번뇌심을 물들 염자, 마음 심자, 염심(染心)이라고 하고, 자성심을 깨끗할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도 하고. 항상 이걸 가르쳐요. 그러면 자성심은 청정심이라.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 항상 있는 거예요, 자성청정심. 그런데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또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기도 해요. 이걸 번뇌소염심(煩惱所染心)이라고 해요. 번뇌에 물든 바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고, 자성청정심을 도대체 어떻게 아냐. 이걸 난가료지(難可了知)라고.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다. 승만경에서 아주 자세히 가르치고 있는데요. 우리에게 다 자성청성심이 있는데, 알기가 어렵다는 거거든요. 또 번뇌소염을, 그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게 되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 번뇌심도 알기 어렵고, 자성심도 알기 어렵다. 자성이 그렇게 청정하면 왜 번뇌에 물드느냐. 번뇌에 물들었으면 왜 자성이 또 청정하냐. 청정과 번뇌가, 염심과 정심이 항상 함께 있어요. 번뇌심 떠나서 청정심이 있는게 아니고, 청정심 떠나서 번뇌심 있는 게 아니고, 항상 함께 해요. 항상.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승만경에서,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어차에(於此), 어차라는 건 무명을 말하는데, 미혹한 마음이다 이거죠, 미혹. 미혹이라는 게 뭐냐. 초기 경전에선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황금 덩어리가 있어요. 그래서 황금 덩어리를 싸가지고 와서 오래 있다 보니까 그게 누런 독사뱀이었어요. 독사뱀이 서려 있는 것을 황금으로 잘못 보는 것이 무명이다, 그것이 미혹이다라고 설명을 했어요. 독사가 잠 들어있는데 이걸 황금으로 봤단 말이죠, 독사를. 황금으로 보이니 그걸 주워 왔어요. 그게 업이란 말이에요. 나중에 독사가 집에서 깨어나서 사람을 해쳤어. 그게 고통이다.> 이렇게 혹업고를 설명을 하는데요. 대승 경전에서는 이 무명을 어떻게 설명을 하냐. <어떤 사람이 저녁에 뱀이 서려 있는 걸 봤는데, -역시 뱀이네.- 나중에 보니까 그 뱀이 뱀이 아니고 검은 삼 껍질로 만든 밧줄이었다. 그래서 검은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걸 미혹이라고 해요. 사실은 밧줄인데 ‘아, 여기 큰 뱀이 서려 있네.’ 해서 그걸 뱀으로 잘못 보는 순간에 겁이 나서 보이지도 않는데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쳤어요. 도망가는 게 업이고 다치는 게 고라고, 혹업고.> 이게 번뇌에요. 첫째는 잘못 보는 거예요, 무명. 잘못 본 것에 기초를 해서 또 행위를 하는 거예요. 행위에 의해서 또 고통이 오는 거예요. 이게 전부 번뇌인데, 문제는 뱀으로 잘못 보는 마음이 아무리 잘못 봐도 그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에요. 달라짐이 없이 그대로 잘못 보는 거예요. 이게 청정심 그대로 번뇌심이다. 이게 어렵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 번뇌심은 근본이 뭐냐 하면 뭘 일으키는 건데, 일으킬 기자(起), 번뇌는 기야라, 일으키는 거다. 일으킴이 없으면 번뇌가 아니에요. 뭘 자꾸 일으켜. 뭘 자꾸 만들어. 그럼 일으키면 어떻게 되냐. 찰나심(剎那心)이 돼요. 청정심이 찰나. 찰나심은 뭐냐, 순간순간 마음인데, 사람 볼 때는 순간 사람 보는 마음이 일어나요. 나무 볼 때는 순간 나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물건 볼 때는 순간 물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게 찰나심이에요.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剎那心 剎那相應). 항상 함께해요, 보이는 것과. 함께하는 것을 상응이라고 하거든요. 서로 상자, 응할 응자. 내가 여기 물잔을 보면 이게 찰나심인데, ‘아, 요거는 물을 마시는 그릇이구나.’ 이렇게 상응을 해요. 그래서 물을 마셔요. 이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이게 번뇌에요. 그래서 사람을 보면 사람을 딱 보고 그 사람과 함께해요. 그래서 마음에 들면 아주 좋은 생각이 일어나고, 마음에 안 들면 막 화가 나서 싸우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도망가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쫓아가기도 하고 이게 번뇌에요. 번뇌심은 항상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찰나 찰나 상응하는 거예요. 그게 오래 안 가요. 요거 볼 때는 요거에 함께 하다가, 또 다른 거 보면 다른 것과 함께해요. 금방 화를 내다가 그거 지나면 화가 안 나고 딴 게 와요. 또 어떤 때는 동시에 앞으로 볼 땐 화나고, 뒤로 돌아서서는 웃고 이런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찰나심이 찰나상응하는 게 아주 빠르고 복잡하고 이런데, 문제는 그 찰나찰나 대상과 함께 해도 함께 하는 그 근본 뿌리는 자성청정심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가 눈이 있는데, 얼굴의 눈이 나무를 보기도 하고, 사람을 보기도 하고, 물건을 보기도 하고 하는데, 물건을 볼 때도 눈이고, 나무를 볼 때도 눈이고, 사람을 볼 때도 눈이고, 눈 하나 그대로인 상태에서 온갖 걸 다 보고 온갖 것과 다 함께한다. 또 그거 지나가면 다른 것과 함께하고. 이게 찰나심 찰나상응이라고 가르쳐요. 자성청정심과 이렇게 찰나상응심이 항상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괴로우냐. 늘 찰나상응심으로만 살기 때문에 그래요. 자성청성심으로 딱 돌아가면 찰나상응심은 없어요. 우리가 근심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대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거든요. 사람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물질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또 여러 가지 생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그래서 생각과 사람과 물질을 떠나면 괴로움이 없어요. 근데 그것은 전부가 찰나상응심이다. 찰나찰나에 다른 대상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괴로움은 밖에서 온 거기 때문에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뭐냐. 그게 자성청정심이거든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으로 딱 돌아가면 괴로움은 없어요. 그런데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괴로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것을 갖다 집어넣어요. 사람한테 괴로우면 물건으로 그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또 물건한테 괴로우면 사람으로 또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그거는 늘 찰나의 마음을 찰나로써 치료하려고 하니까 맨날 괴로움의 형태가 바뀔 뿐이지 괴로운 행위는 계속된다 이거죠.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상적상광이라(自性清淨心 常寂常光).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나는 게 자성청정심이에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자성청정심이 있는데 찾아보면 없어요. 마음을 보려고 아무리 몸을 갈라봐도 안 보여요. 그런데 항상 마음이 있어요. 이걸 상적상광이라고 하거든요.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난다고. 번뇌소염심은, 번뇌에 물든 마음은 찰나상응이라(煩惱所染心 剎那相應). 늘 찰나찰나에 상응을 해요. 그래서 우리 주인이 항상 바뀌는 거예요. 어떤 때는 물질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재물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몸이 내 주인이 됐다가.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늘 한평생 모르고 살다가 모르고 죽는다 말이지. 그래서 우리 몸을 명색(名色)이라고 그러는데, 이름 명자, 보인다는 빛 색자, 명색, 명은 생각이에요. 수상행식이라는 반야심경의, 수상행식은 안 보이고 이름만 있다고 이름 명자를 써요. 색은 우리 몸인데 지수화풍이라고 그래요. 우리 몸은 지수화풍, 흙과 물과 따뜻한 거와 호흡, 바람 이런 걸로 되어있다, 이게 색인데. 이 명색은 환신(名色幻身)이에요. 환같은 거예요, 헛개비와 같다. 금방 있다 금방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안에 자성청정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환속에서 참됨을 찾아야 된다고 해서 즉환명진(卽幻明眞)이라고 하는데, 환에 당도해서 참을 밝힌다. 즉환명진. 그런데 여기서 정관조견(定觀照見)이라고, 선정이란 정자는 대승불교에서 멈춘다고 봐요. 멈춰서 보는 것으로, 멈춰 본다, 이게 정관인데, 선정이란 정자와 볼 관자. 멈춰 본다는 말이에요. 정관으로. 조견오온개공이라고 있는데, 조도 볼 조자고, 견도 본다는 볼 견자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딱 보면, 이게 정관조견이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보면, 정관으로 조견을 하면, 진여법신이라(眞如法身). 우리 명색환신이 그대로 진여, 참 그대로 법의 몸이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명색환신에서 진여법신을 조견한다, 본다. 보는 게 어렵나.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안 보이냐. 찰나상응으로 항상 사는 거예요.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그래서 못 깨닫지. 정관으로 조견하면 진여법신이 이 생로병사 명색화신에서 그대로 보인다 이거죠. 이걸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대로 있는데 왜 못 보냐. 이걸 신라화엄가에서는 뭐라고 하냐 하면,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잘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이 있는데 그걸 총수록(叢髓錄)이라고 해요,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 총수록이 있는데, 총수록 네권이 있는데 그 세 번째 권에 무슨 말이 있나 하면, 사대오온 명색화신에서 진여법신 자성청정심을 못 보는 이유를 비유로 설명을 해보자면, 수변인이(在水邊人), 물가의 사람이, 물가에 있는 사람이, 수변, 물가에 있는 사람이란 말은 맑은 연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어떤 사람이 갔어요.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연못 안에는 여러 가지 물에 비친 그림자 영상이 있는데, 그 영상만을 보지, 영상 그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순간에는 물을 못 봐요. ‘아, 저건 산이다. 저건 나무다. 저건 돌이다.’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볼 때는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지 물은 볼 수가 없다. 그럼 물을 못 보는 이유는 뭐냐. 지유(只由), 오직, 말미암아, 오직 그것때문이다 그 말인데, 무엇 때문이냐. 기수로, 그 물로써 위안고(不以其水 爲眼故也)라, 눈을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이라고 하는 건 보는 건데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에요. 그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는 것은 오직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보지 못한다. 이게 뭔 소린가 하면, 연못 속에는 연못 속에 비친 물건이 없어요. 산이 보여도 물속에 산이 없고요. 사람이 보여도 물속에는 사람이 없고요. 구름이 보여도 물속에 구름이 없거든요. 오직 물 하나뿐이에요. 그런데 연못 속에 가서 보는 사람은 물속에 있는 그림자만 보지, 그림자 보는 그 순간에, 그 찰나에는 물은 전혀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연못가에 가서 보는 사람이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만 보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 법문이었어요. 기가 막힌 법문.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사람을 봐도 전부 우리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인 거예요. 재물을 봐도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고. 자성청정심이 없으면 사람을 보되 사람을 볼 수가 없고, 산을 보되 산을 볼 수가 없고, 물질을 보되 물질을 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물속에 뭐가 비쳐도 전부 물뿐인 거예요. 물 다 퍼 내봐요. 거기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지, 거기. 그냥 빈 연못 바닥뿐이지. 아, 이것 참 기가 막혀요. 밖에 걸 딱 보는데 이게 내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잔데, 밖에 것 보다가 내 자성청정심 모르는 거예요. 연못가에 가서 딱 보니까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 보다가 물은 못 본다 말이죠. 그래서 그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 물뿐이라는 것을 알듯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게 전부 자성청정심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보이고 듣는데 절대 괴로울 수가 없어요. 항상 즐거워요. 그걸 상락아정이라고 그래요. 그럼 그걸 보는 방법이 뭐냐 이거죠. 기도하고, 경 읽고, 마음 닦고, 참선하고 하는 게 전부 이 찰나번뇌심에서 자성청정심을 보는 행위에요. 그거 전체를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